나잇값만큼 깊어지는 여자의 우울과
우울을 모독하고 싶은 악의 때문에

창문 꼭꼭 닫아둔 여자의 베란다에선
여린 식물들부터 차례대로 말라 죽기 시작했다
볕이 너무 좋았으므로 식물들은
과식을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된 것이다

악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여자의 노련함 때문에
한 개의 꼬리가 아홉 개의 꼬리로 둔갑한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여자는
그림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를 친다

자기 기억을 비워내기 위해
심장을 꺼내어 말리는 오후
자기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헹구는 오후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홍등가가 되나

늙어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나이만큼 무한 증식하는 추억 때문에
여자의 심장이 비만증에 걸린 오후
드디어 여자는 코끼리로 진화했음을 안다

진화에 대해서라면 여자도 할 말이 있었다
한때 여자도 텅 빈 육체로 가볍게 나는
작고 작은 새 한 마리였으므로

이제 여자는 과거에 대해서만
겨우 할 말이 있을 뿐이다
공복의 시간은 여자에게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없고 시시각각만이 존재하는
여자 앞에서
아무도 세월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축대 난간에 기댄 모르는 노인네의 울음까지도
귀 기울여 참고해왔으므로 여자는 안다

사람의 울음을 위로한 자는 그 울음에 접착된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그러나 울음은
유목의 속성이 있어 들어줄 사람을 옮긴다
더 큰 울음보를 장전하기 위해
더 큰 고통을 발명한다

여자의 손안에는 꼭 쥐어 짓물러진
과일이 들어 있다
그 즙이 소맷자락을 타고 올라가
끈끈한 악취를 풍긴다
그럴 때면 여자는 안달이 난다

악취를 우울로 포장해줘
시퍼런 나뭇잎들은 나의 우울을 모독해줘
후회 없이 하루를 살다 누렇게 시들게 해줘

여자는 언제나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순교자를 강간하고 퍼질러 앉았던
꽃방석이 있다
비로소 여자는 기형아를 낳는다

기형아를 꺼내고 홀쭉해진 배를 여자는
시뻘건 육식으로 가득 채운다 마치 아귀처럼
마치 악다구니처럼 그렇지만 아름다웁게

(김소연, 『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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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자는 과거에 대해서만
겨우 할 말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그러나 울음은
유목의 속성이 있어 들어줄 사람을 옮긴다
더 큰 울음보를 장전하기 위해
더 큰 고통을 발명한다"

"시퍼런 나뭇잎들은 나의 우울을 모독해줘
후회 없이 하루를 살다 누렇게 시들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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