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하면 모자가 떠올라 나는 한참이나 막막하다. 나는 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자,하면 나는 혼자 되는 기분이 된다. 나이가 들면, 꼭 정중한 모자를 쓰고 다니고 싶다. 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 내가 싫다. 모자가 잘 어울리는 내가 되고 싶다. 언젠간 그렇게 될까. 모자가 잘 어울리게 된 나를 상상하면 기분이 좋다. 그 모자 참 잘 어울리네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모자가 안 어울리는 건 아마 내게 어울리는 모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명절 때가 되면 텔레비전에선 마술쇼를 보여주곤 했었다. 마술사는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곤 했다. 아주 하얀 비둘기들이 커다랗게 날갯질을 하면서 모자에서 튀어나는 그 장면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모자 속엔 어떤 하늘이 있어서, 저렇게 착하고 예쁜 비둘기를 키울까. 그게 말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지. 모자의 속은 깊고 넓다.

너무 쉬운 속임수가 되었는지, 이제는 그런 장면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어렵고 불가능해보이는 것만 보여주는 마술쇼를 이제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모자 속에서 새가 나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사람들은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모자가 숨겨놓고 있는 그 막막하고 넓은 하늘 위로 떠가는 작은 구름의 조각이 신기하지 않단 말이야?

구름, 하니 모자. 모자, 하니 비둘기.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르는 한 사람. 모자가 참 잘 어울리는. 아니 어울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는 조용하고 싶은 눈매를 가진 사람. 화가 날 땐 말을 하지 않고, 멀리 보듯 자신의 속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사람. 머물르기 보단 멀리가지만 반드시 돌아오던 그런 사람. 나는 그런 그를 참 사랑했었다. 사랑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 그는 참 아르마운 사람이지 모자가 잘 어울리는

나는 그가 모자를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밀짚모자를 쓴 것을 꼭 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그저 상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분명하게 밀짚모자를 쓴 그를 떠올릴 수 있다. 환한 낮의 일부를 가린 밀짚모자의 챙 그늘이 그의 얼굴 어느 부분을 가린다. 그가 부드럽게 웃는다. 그의 모자 뒤로 아주 작은 뭉개구름이 다른 구름을 찾아 흘러가고 있다. 햇빛이 가만가만 그 구름의 등을 비추고 있다. 아 좋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다.

혹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그를 다시 만나면 밀짚모자를 하나 선물해주고 싶다. 그가 머뜩지 않게 여기더라도 꼭 그에게 그 모자를 씌우고 싶다. 그런 그의 사진을 한 장 찍어 남기고 싶다. 그런 다음이라면, 다시 작별하여도 괜찮을 거야. 그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괜찮아. 기쁜 마음으로 안녕, 안녕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그 모자를 가지고 아주 멀리 떠나더라도. 그래서 다신 우리가 보지 못하더라도.

구름을 보면 나는 모자,를 떠올리고, 그 모자 속에선 비둘기도 나오고 당신도 있구나, 하고 막막해한다. 도무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차곡차곡 나타나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니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나는 모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자가 잘 어울리는 내가 모자를 쓰고, 비둘기와 당신을 잊거나, 완전히 함께할 수 있다면,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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