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더 높은 곳에서 춤추게 되면 싸락눈으로 변합니다.
 구름의 과정을 통해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거죠.“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우리는 말이 없었다. 제법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었으니, 대화 없이 오래 마주할 수 있었다. 후배 앞에 놓인 잔에 얼음이 거의 녹아버렸다. 할 말도 없으면 우리는 그렇게 종종 만나는 사이였다. 빈 곳을 메꾸는 성격의 나와, 채워진 것을 비우는 후배는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같은 사이여서 둘은 사귀는 게 좋겠다는 조언 같은 것도 참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나와 후배는 화를 내는 척하면서 웃었다. 정말로 그럴 수는 없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침묵을 지킬 때가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서로, 무슨 생각해,라고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방금 그렇게 꾸며 생각해버리게 된 것인지는 둘이 만나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하지만 막상 만나면 그런 얘기는 잊을 것이 분명하다.

선배 구름은 얼마나 살까요. 나는 후배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뒤통수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충 보아도 대여섯 점은 족히 넘을 구름이 흩어져 있는 초여름 하늘이었다. 그것 중 어떤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가늠도 못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충 대답했던 것 같다. 한두 시간, 뭐 이렇게. 후배는 그런 나의 건성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덧붙였다. 구름은 한 번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다르겠지. 그때처럼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그 질문을 들은지 한참인 지금까지 여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지. 후배는 역시 내 건성과 무성의함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저 구름을 얼마나 멀리서까지 볼 수 있을까. 반대쪽에 가면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할까. 동시에 다른 곳에서 같은 구름을 촬영하면 어떨까. 그게 가능할까 등등의 질문들을 함꺼번에 띄워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몇 번인가 진지하게 때론 농담으로 대답을 하다가 관두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잘 몰랐고, 노력한다고 다르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어쩄든.

후배는 멀리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유럽이었다. 영국으로 갔다가, 거기서 몇 달, 그리고 남유럽을 따라 돌다가, 헝가리에서 몇 년 체류한다고 했다. 무슨무슨 지원을 받아 가지만 내키면 이렇게 저렇게 눌러앉을 수도 있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아쉬웠으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절절함 잔뜩 묻혀 가지 마라, 말릴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후배 역시 말린다고 가지 않을 나이가 아니었고. 헝가리. 가본 적이 있었지만 별 다른 감흥이 없는 나라. 부다페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만 며칠 묵어본 적이 있었고. 해줄 말이 없어서, 누구나 다 아는 얘기 몇 마디해주고 말았었다. 부다페스트의 구름은 말이야, 좀 견고한 느낌이야. 좀처럼 흩어지지도 않고, 잘 웃지도 않아. 무뚝뚝하지. 뭔지 알지 그런 구름? 가면 너 아마, 여기 구름이 못 견디게 그리워질걸. 무척 무척. 후배는 말이 없었다. 그냥 앞에 놓인, 얼음 녹은 물만 남은 잔을 휘휘 저었던 것 같은데 이 역시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게는 그렇게 꾸며 기억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아무튼 그렇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때 후배가 말도 못하게 쓸쓸해보였기 떄문이 아니었을까 이제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뒤, 후배는 정말 떠났다. 그렇게 떠나던 날에야 나는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세 잊어버렸다. 대개 그렇지 않나. 빈자리는 이상한 형태로 지워지거나 잊히거나,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그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랬다간,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터져버릴지도 모를 일이지. 후배에게는 엽서 한 장 오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후배가 아주 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별 말하지 않고 오래오래 마주 앉는 사이였다.

그러나, 초여름, 그 계절. 나는 구름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다페스트의 구름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말도 없고 절대 친절할 수 없는 그런 구름. 후배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 불쑥, 우리 서울 하늘 어떤 구름 아래서 불쑥 만나는 거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또 마주앉아서 오래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배는 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선배, 구름이에요. 구름. 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이제는 말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찾으려는 노력도 없긴 했었지. 구름이면 다행이다. 구름이 되기만이라도 한다면 말이지. 잘 지내지? 잘 지낸다 나는. 이제 그만 와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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