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좋아하는 사람을 안다. 아침, 눈을 떴을 때 비가 오면 그녀는 창가에 바짝 붙어서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비를 구경하곤 했다. 창문을 닫아놓고서, 그게 어디 보이기라도 하겠는가. 그러니 창문을 활짝 열고서,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나 겨울도 관계없이 그렇게 하고서 비가 오는 것을 넋을 놓고 보았다. 그리하여 감기에 걸리고, 콜록거리며 며칠을 앓았던 적도 있었다. 도대체 왜 감기에 걸린 것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비를 보다가 그랬어, 이렇게 말하지는 않고, 후후, 하고 웃었던 것인데. 나중, 나중에야 나는 그녀에게 그러한 버릇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때의 병증을 이해하며 아파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비 맞기를 즐겼다,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작게 때로 세게 내리는 비 보기를 즐겼던 것뿐이다. 먹장구름 아래, 날리거나 쏟아지는 비, 부옇게 밝은 낮에 기습처럼 내리는 비. 그녀는 비의 종류나 형태를 차별하지 않고 좋아했었다. 언젠가 딱 한 번, 유독 비가 드물어 가문 어떤 가을에 그녀가 내게 (아마 취해서였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녀는 좀체 술을 마시는 법이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자꾸 어떤 사람이 기억난다고. 그래서 좋다고. 그 어떤 사람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사실 짐작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을뿐더러,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다음 그녀는 몇 마디인가 말을 더 이어붙였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나는 그 혹은 그녀가 술에 취했을 거라 짐작하는 것인데) 나는 그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아니 사실 이건 나의 심리 탓일 수도 있다.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그 혹은 그녀를 무척 좋아했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늘상 잠이 부족하여 견딜 수 없으면서도 나는 그녀를 찾아가거나, 대화했고, 부족하면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가 떠올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들어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넉넉한 사람이 못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는 못할 테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포기가 늘었으니까. 그녀는 불행하게도 그나마의 지금 나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지도 못하였다. 나는 버리듯 그녀를 떠나 어두운 골목을 따라 혼자 집으로 돌아갔는데, 달도 별도 없이 온통 구름만 가득한 밤인마냥, 그 길은 어둡기만 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새벽쯤, 열과 한기에 놀라 퍼뜩 깨어났을 땐,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문 너머로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으니 알 수 있었다. 창문 아래 난간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들, 방의 깊은 안쪽 너머로 튕겨지듯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나는 아팠다. 마음이 몸에 부대껴, 몸이 마음에 부대껴 열이 났었다. 그 어떤 사람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그 새벽을 끙끙거리며 혼자 앓았다. 앓으면서 생각했다, 내 생각을 했을까 잠시라도. 며칠이 걸렸을까. 침대에 누워 흘리듯 보낸 그 며칠 동안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몇 번인가 연락이 왔었지만, 나는 그 연락을 받지 않았다. 병은 대개 나아지는 법이라서, 나는 하루, 또 하루 보내면서 나아졌다. 아니 묻었다. 앓은 뒤엔 배운다고 하던가. 그 말이 맞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잊는 법을 묻어버리는 법을, 그 며칠간의 투병 끝에 배우게 된 것이었다. 더는 밤에 잠이 오질 않거나, 비가 내리는 풍경에 마음이 무너질 필요도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가는 법이라서 한달, 일 년, 이 년. 누가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게 되었다.


세상은 그리 넓지 않지만, 그만큼 좁지도 않다. 우연히라도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없다. 그녀 쪽에선 모르지. 먼 곳에서 나를 보았는지도. 그때 등을 돌렸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는지 혹은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비가 내릴 것 같으면 나는 피할 수 없이 그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비는 등을 돌리건 그 자리에 멈춰 서건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어떤 식으로는 젖게 된다. 또 이건 좀 어쩐지 치사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살면서 어떻게, 비를 피한단 말인가. 그러니 어쩌면 평생 생각하고 살라고, 내게 부린 투정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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