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에게

from Un_post/Post_post 2011. 9. 9. 02:19
나의 친구에게
- J



이곳에 편지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한 후에 창문을 열었습니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침착해졌고, 아끼는, 어디에 두었는지 잊고 있었던 만년필이 떠올라 찾았습니다. 잉크가 다 말라버렸더군요. 한 계절을 쓰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글씨를 써보았습니다. 저의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막연하게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었지요.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긴 문장도 썼는데, 그 내용은 영영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혼자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혼자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침묵의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그럴 필요도 없는 지금, 저는 나의 친구인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혼자라는 감정은, 당신이 이른 것처럼 “참담”합니다. 그 덕분에 황홀하기도 하여서, 나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매번 그렇지는 않습니다. ‘혼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나의 방으로 돌아와, 필요한 절차를 해치운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나에게 문밖은 언제나 혼란하고 방만하여서 두렵고 어지럽습니다. 안을 만드는 것은 바깥입니다. 나는 또 부지런히 안을 만들고 바깥으로 나갑니다. 내가 안을 만드는 그동안, 그러니까 참담해지는 그 시간을 처음에는 기꺼이 나중에는 힘겹게 받아들입니다. 안에서 나는 마르고, 바깥에서 나는 아픕니다. 생활은 그리하여 조금씩 닳아갑니다.
나는 요즘 어린 시절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그때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몸에 가지고 있었던 때이지요. 그것은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그때의 힘을 지금에 와서는 소비하고 있습니다. 나의 안과 밖은 점점 가난해지만, 한때 풍요로웠으므로, 그리고 지금은 언제나 그때이므로 나는 괜찮습니다. 



얼마 전 당신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을 때, 나는 무수한 접속사들을 생각했는데(이는 딱히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할 때에 나오는 나쁜 버릇입니다), 빈틈이 없이 어떤 말들을 적어냈을 때 나 괜찮아졌습니다. 아주 짧고 산만한 글이었지만 쓴다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어서 동시에 밖으로 가 어느 누군가에게 닿는 일이어서 그렇습니다. 책상에 앉아 노동을 하여야 하는 시간에 마련한 그 쓰기는 언제나 계산을 하고 외면으로 드러내거나, 그러냄을 감추어야 하는 피로로부터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아주 잠시었지만,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고마웠습니다. 
종종 이런 시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 망설임이 많고 게으른 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서,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좀 부질없이 장황한 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열린 창틈, 초가을 밤, 바람과 하늘, 가벼운 무게, 의자, 책과 책의 사이. 먼지, 가까운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서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나를 제외한 그것들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안경을 벗고 잠시, 의자에 깊이, 몸을 맡겨봅니다.



친구.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것은 언제나 방황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것이 나비의 움직임과 같기를 바랍니다. 형언하기 어려운 형태의 의미를 가져오기를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므로 동시에 나타나고 위태로운 것이므로. 스쳐지나가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일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방금 저는 담배를 피우고 왔습니다.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바깥은 고요합니다. 잠들지 못하는 것들과 잠든 것들의 사이는 어둡고 평온합니다. 세계가 늘 이러하였으면 좋겠고, 또 싫습니다. 엘리베이터엔 서정주의 시와 CCTV에 찍힌 차량털이 범의 사진과 곶감을 판매한다는 전단지가 붙어 있습니다. 누군가 진하게 향수를 뿌렸나 봅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을 것이고 너무 깊어가다가 아침이 올 것입니다. 내일 저는 멀리 다녀와야 합니다. 이제 그만 자야겠지요. 이 편지에 더는 손을 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더 용감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우정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각별함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금들이 켜켜이 쌓였을 때 그것을 보아주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은, 그것이 어떤 모양이든, 훌륭하고 아름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지난할지라도. 


2011년 9월 9일
당신의 친구가 우정과 진심을 담아.


 morteble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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